[일본에서 만난 모더니즘 미술과 건축 7] 도쿄 SOMPO 미술관과 《모리스 위트릴로전》

김환기, 김병기, 유영국 지도한 모더니스트 도고 세이지 미술관으로 출발 2020년 7월 독립된 미술관 건물신축 , SOMPO 미술관 개관  《모리스 위트릴로 : Maurice Utrillo》전 , 2025. 9.20-12.14

2025-11-05     안태연 객원기자

일본 도쿄에서 시부야와 더불어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부도심으로 꼽히는 신주쿠(新宿). 일본 롯데그룹과 비디오 게임 회사 스퀘어 에닉스 등 여러 대기업의 본진이기도 한 이곳에도 약 반세기에 걸쳐 문화의 전당 역할을 해 온 미술관이 있다. 보험사 손포 재팬(損保ジャパン)에서 운영하는 SOMPO 미술관이 그것이다. 기업 본사에 부설된 작은 미술관으로 시작해 이제는 도쿄를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로 자리잡은 이 곳을 지난 10월 17일 다녀왔다.

모더니스트 도고 세이지의 컬렉션에서 시작된 미술관

1976년, 야스다화재해상보험(손포 재팬의 전신)은 신주쿠의 본사 건물 42층에 도고 세이지 미술관(東郷青児美術館)을 개관했다. 도고 세이지(東郷青児, 1897-1978)는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1916년 일본의 재야 성향 공모전인 이과전(二科展)에서 최고상인 이과상(二科賞)을 받는 등 청년 시절부터 일찍이 주목받은 화가였으며, 1921년에는 프랑스 유학을 떠나 7년간 체류하며 이탈리아 미래파에도 몸담는 등 모더니스트로 활약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에콜 드 파리의 총아’로 불린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1886-1968)와 함께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를 운영하며 청년 작가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인 유학생으로 도쿄에 머물렀던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유영국(劉永國, 1916-2002), 김병기(金秉騏, 1916-2022) 등도 이곳에서 도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을 가지 못한 전혁림(全爀林, 1916-2010)도 도고가 부산에서 모더니즘을 강의했을 당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도고 세이지는 일본 모더니즘 미술의 스타로 군림하며 한국 모더니즘 미술 전개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도고 세이지, 초현실파의 산보, 1929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64×48.2 cm, SOMPO 미술관 소장, SOMPO 미술관의 로고로 채택된 이 작품은 제16회 이과전에 처음 선보였으며, 일본 초현실주의 미술의 태동을 알리는 작품 중 하나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도판: SOMPO 미술관 제공)
도고 세이지, 망향(望鄕), 1959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116.1×90.7 cm, SOMPO 미술관 소장, 제5회 일본국제미술전에서 대중상을 받은 이 작품은 도고 세이지의 여인상을 대표한다. (도판 : SOMPO 미술관 제공)

2020년 7월 독립된 미술관 건물신축  개관  

그런데 지자체가 아닌 보험사에서 도고 세이지의 미술관을 개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도고가 귀국한 뒤 <여인상> 연작으로 큰 인기를 얻은 이래 야스다화재해상보험과 오랫동안 디자이너로 긴밀한 협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비록 도고는 미술관이 개관하고 2년 뒤 작고했지만, 유족이 그해 도고의 유작 156점을 포함한 작품 345점을 정식으로 도고 세이지 기념미술관에 기증했고, 이후에도 미술관이 지속적으로 작품 수집을 이어온 덕분에 현재는 도고 세이지 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외에 걸친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컬렉션으로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일본의 버블 경제가 한창이던 1987년에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 중 한 점을 3985만 달러에 낙찰받아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7월에는 본사 옆의 부지에 독립된 미술관 건물을 신축, SOMPO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개관하기에 이르렀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100.5×76.6 cm, SOMPO 미술관 소장, 198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3985만 달러에 낙찰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도판: SOMPO 미술관 제공)
신주쿠의 손포 재팬 본사 옆에 신축된 SOMPO 미술관 건물 전경 (촬영: 안태연)

신축된 SOMPO 미술관 건물의 설계는 ‘다이세이(大成) 건설주식회사 1급 건축사 사무소’가 담당했으며, 지상 6층과 지하 1층에 걸친 규모이다. 본사 옆의 부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대지 면적은 그리 넓지 않으나, 5층과 3층까지 총 세 개의 층에 걸쳐 전시실을 할당했기에 본사 건물에서 운영되던 시절보다 훨씬 큰 규모의 전시를 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건물 외관은 도고 세이지의 작품을 의식해 곡선적인 형태와 부드러운 은백색 외벽을 채택했다고 한다. 이는 미술관의 로고로 채택되어 현수막 등에도 활용되고 있는 도고의 대표작 <초현실파의 산보>(1929, 도고 세이지 미술관 소장)와도 좋은 조화를 이룬다.

모리스 위트릴로가 그려낸 에콜 드 파리의 감성

이 미술관은 1920년대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모더니스트로 활약한 도고 세이지의 미술관으로 시작했기에, 관명을 변경한 현재도 20세기, 그중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술을 다룬 기획전을 주로 마련해왔다. 올해 하반기에는 20세기 초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인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1883-1955)의 회고전을 마련했으며, 주요 소장처인 파리 퐁피두 센터의 소장품을 필두로 도쿄의 아티존 미술관, 하코네의 폴라 미술관, 구라시키의 오하라 미술관 등 일본 각지에 소장된 작품 7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특히 야기(八木) 파인 아트 컬렉션에서 대여한 작품이 유독 많았는데, 이곳은 일본에서 위트릴로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라고 한다. 위트릴로가 72년의 생을 살며 남긴 작품이 수천여 점에 달하는지라 일본에도 많은 작품이 소장된 모양이다. 특히 몽마르트르의 선술집 <라팽 아질>은 무려 300번 넘게 그렸다고 하며, 이번 전시에도 <라팽 아질> 연작 여러 점이 모였다.

모리스 위트릴로, 마르카데 거리,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60.3×81.3 cm, 나고야시미술관 소장 (도판: SOMPO 미술관 제공)
모리스 위트릴로, 라팽 아질,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50×61.5 cm, 퐁피두 센터 현대미술관 소장 (도판: SOMPO 미술관 제공)

비록 위트릴로는 미술 학교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화가가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성장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19세기 말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뮤즈로 널리 알려졌고 화가로도 활발히 활동한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55)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사생아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9세 때 스페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겸 화가였던 미쿠엘 위트릴로(Miquel Utrillo, 1862-1934)의 아들로 입적해 성을 물려받아야 했다. 게다가 선천적인 정신 질환에 더해 외할머니의 품에서 너무 일찍 술을 배우는 등 순탄치 않은 성장기를 보냈고, 결국 그는 어린 나이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모리스 위트릴로, 아름다운 성체배령사-토르시 앙 바로아의 교회, 1912년경, 캔버스에 유화 물감, 52×69 cm, 야기(八木) 파인 아트 컬렉션 소장 (도판: SOMPO 미술관 제공)

다행히 위트릴로는 어머니로부터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은 덕분에 일찍이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결과적으로 1909년 프랑스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 입선해 화가로 데뷔했다. 그리고 이 무렵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백색 시대'가 시작된다. 이때 그는 파리의 거리가 지닌 질감과 색채를 표현하고자 물감에 석고나 호분(조개껍데기를 갈아 만든 흰색 안료) 등을 섞었고, 물감을 나이프로 두껍게 바르는 기법까지 활용하며 특유의 화풍을 확립했다. 필자는 지난 2019년 파리를 여행하면서 그가 즐겨 그린 몽마르트르 거리를 다녀온 바 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하얀 벽으로 가득한 거리에 들어서니 위트릴로가 왜 백색, 그것도 빛바랜 듯한 백색을 즐겨 썼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다만, 위트릴로는 파리 풍경을 그릴 때 현장에서 직접 그리기보다는 엽서 또는 사진을 보면서 그렸고, 이번 전시에도 작품에 활용된 엽서와 사진의 복사본이 일부 소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위트릴로가 그린 장소를 직접 가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흑백으로 인쇄된 사진 또는 엽서를 보면서도 그동안 무수히 접한 파리 풍경의 색채와 질감을 제대로 되살렸다고 해석하는게 옳을 듯하다.

모리스 위트릴로, 샤르트르의 앙굴렘-생 피에르 대성당, 1935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111×130.5 cm, 히로시마 미술관 소장 (도판: SOMPO 미술관 제공)

​ 이후 위트릴로는 1913년 봄 남프랑스의 섬 코르시카(Corsica)에서 잠시 지낼 무렵 점차 심리적인 안정을 찾으면서 밝은색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는 정신 치료 과정에서 엷은 하늘색이나 분홍색, 진한 녹색 등도 즐겨 활용하며 인물도 함께 그리는 등 활기찬 화풍의 '색채 시대'로 변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색채 시대는 백색 시대에 비해 평가가 낮은 편이다. 정신적 불안이 치유되며 그의 작품 특유의 적막한 분위기가 점차 약해진 탓이다. 물론 그가 워낙 다작했기에 쌓인 감각이 있어서인지 말년에 들어서도 작품의 질이 지나치게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전성기의 개성은 희미해졌다. 비슷한 시기 에드바르 뭉크가 정신 질환이 호전됨에 따라 불안으로 가득한 특유의 화풍을 점차 잃어갔듯, 성공이 불러온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1930년대 이후 위트릴로의 작품은 시간을 들여 그린 유화보다 빠르게 그린 수채화가 더 인상에 남았다. 유화보다 경쾌한 색채와 필치로 그린 수채화 연작이 행복한 결혼 생활과 더불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여유롭게 살아간 노년의 위트릴로와 오히려 잘 어울렸다.  전시는 12월 14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