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찬열의 말하는 춤] 해석에서 정동으로: 동시대 춤 비평의 윤리적 전환

2025-11-08     최찬열 춤비평가

"비평이란 작품의 판정이 아니라 작품을 완성하는 방법이다."(발터 벤야민)

예술 작품의 의미는 작품 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어떤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 내부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몸(body, 체)들, 곧 관객이나 비평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드러난다. 읽기와 쓰기, 그리고 해석을 기다리는 미결정적인 중핵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핵은 미학적 잠재력이 충전된 장소이고, 그 잠재력은 해석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현현한다. 하지만 그 현실화 과정은 결코 단일한 방향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다만 읽거나 보는 이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과거의 미학이 예술 작품을 본질과 형식의 문제로 다루었다면, 현대의 사유는 작품을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주되는 관계적 존재로 이해한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해석학이 말하듯, 예술의 의미는 작품 내부에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세계와 해석자의 역사적 지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드러난다. 곧 작품의 의미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지평 융합’을 통해 새롭게 생성된다.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사유에서 예술은 더 이상 고립된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하나의 사건이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에 의해 봉인된 것이 아니라, 관객과 비평가, 그리고 사회적 맥락이 서로 얽혀 생성하는 의미의 장 안에서 발생한다.

이남영 '디디다-생동' ©예주은. 생성의 흐름 속으로 진입하는 몸짓.

그러나 이 의미 생성은 끝내 완결에 이르지 않는다. 라캉(Jacques Lacan)이 말하듯, 의미는 결코 실재에 도달하지 못한 채 지연되고 미끄러지며, 결핍의 자취를 따라 진동한다. 작품은 결핍을 둘러싼 욕망의 진동 속에서만 살아 숨 쉰다. 그렇기에 비평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결핍의 자리를 탐색하고, 실재의 잔여를 더듬는 행위이다.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하나의 완결된 ‘체(體)’가 아니라, 의미 생성을 매개하는 관계적 장치, 혹은 열려 있는 생성의 무대이다. 그리고 그 장치를 작동시키는 것은 관객의 해석과 참여, 그리고 대화이다. 예술의 의미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관계 맺기를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를 “저자의 죽음”이라 표현했다. 작품은 더 이상 예술가의 의도나 내면의 진실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라, 무수한 기표들이 교차하며 흐르는 언어의 장이다. 따라서 작품의 의미는 독자나 비평가가 그것을 읽고 사유하는 순간에 비로소 살아난다. 의미는 그때, 그 자리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그는 “저자가 죽을 때, 독자가 태어난다”라고 말한다. 이는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가 창작자에서 해석자로 이동했음을 뜻한다.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창작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수많은 해석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장소이다. 작품은 닫힌 폐쇄계가 아니라, 관객이나 비평가의 시선이나 해석을 통해 열리고 다시 쓰이는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된다.

그리고 해석은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 된다. 곧 여기서 더 깊이 내려가 ‘읽는’ 행위는 미세지각의 차원에서 ‘촉발되고/촉발하는’ 감응의 관계로 바뀐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더 이상 작품의 감춰진 의미를 해독하는 해석자가 아니다. 오히려 작품에서 생성되는 정동(affect)의 흐름에 참여하여 그것을 함께 재구성하는 공동창작자이다. 따라서 비평이란 단순히 예술 작품을 평가하거나 규정하는 언어적 절차가 아니다. 비평은 정동의 흐름을 이어 붙이고, 확장하는 창조적 실천이며, 몸과 언어, 감각과 사유를 교차시키는 또 하나의 예술 행위이다. 비평은 작품을 대상화하기보다, 그 안에서 솟아오르는 정동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감응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근대적 예술관 속에서 예술가는 흔히 창조자 신(神)에, 예술 작품은 그가 창조한 자족적 우주에 비견되었다. 이 관념에 따르면 춤 작품 역시 안무가의 사유 속에 선행적으로 존재하던 의미를 무대 위로 옮겨 놓은 형상물로 여겨졌다. 곧 춤은 안무가가 구상한 내적 세계를 단순히 재현하는 몸짓의 총체, 혹은 기표의 구성적 체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춤 공연은 안무가의 의도와 무관한 예기치 못한 의미작용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개방적 장이다.

이러한 변화는 동시대 예술 전반의 중요한 특징, 즉 경계의 해체와 맞닿아 있다. 장르와 형식, 매체의 구분은 점점 무의미해지고, 서로 다른 물질적 감각의 층위들이 맞물리며 새로운 융복합의 미학을 만들어낸다. 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의 춤은 더 이상 순수한 몸짓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과 소리, 이미지와 발화, 개념과 언어, 이질적인 감각들이 끊임없이 섞이고 공명하는 살아 있는 ‘체’이다.

동시대의 춤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기호 체계도, 내면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도 아니다. 춤은 오직 춤으로 존재하기 위해, 움직임 그 자체로서 흐르고 발현되기 위해 있다. 이때 움직임의 주체는 춤추는 이의 의식도, 의미도, 지시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춤 자신일 뿐이다. 이처럼 자기 수행적(performative) 차원에 이른 춤에 견줄 때, 안무와 춤 보기, 창작과 수용의 경계는 점차 희미해진다. 춤은 누구의 것도 아닌 사이의 움직임으로 존재하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자신을 드러낸다.

김지우 '2024, 헤르츠Hz 환상곡' ⓒ잔나비와묘한계책. 동물되기를 수행하는 춤 .

들뢰즈(Gilles Deleuze)가 논한 ‘자유간접화법’은 이와 같은 원리를 철학적 언어로 번안한 개념이다. 그것은 단순한 문체 기법이 아니라, ‘누가 말하는가’의 경계를 해체하는 실험적 언어의 형식이다. 이 문체 속에서 말하는 자와 말해지는 자, 주체와 객체, 내부와 외부는 더 이상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화자는 더 이상 단일한 인격이 아니라, 타자의 언어에 감염된 다성적(多聲的) 존재, 곧 혼성적 ‘체’가 된다. 비평의 언어 또한 이와 같다. 비평은 언제나 ‘나’의 말이 아니라, 타자의 정동이 내 안을 관통하며 내가 말하게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자유간접화법’이 보여주듯, 안무가의 작품이 비평가의 몸과 공명할 때, 그의 언어는 이미 춤추기 시작한다. 비평가의 문장은 작품을 재현하거나 번역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남긴 감각의 흔적과 정동의 여운, 정서의 떨림에 응답한다. 그 문장은 분석보다 감응에, 설명보다 사유의 진동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춤 비평은 작품을 규정하거나 평가하는 권위의 언어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생성하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체’가 된다. 춤과 비평은 서로를 매개하며, 그 사이에서 둘이 얽혀드는 공명‘체’이자 배치‘체’를 구성하는 일, 그것이 춤 비평이다.

이렇게 춤과 언어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스며드는 지대, 몸짓-감각과 춤추는 사유가 상호감염되는 사이의 지대를 연다. 결국 춤과 비평은 모두 살아 있는 ‘체’이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와 접촉, 감염과 공명 속에서 새로운 춤의 윤리가 태어난다. 동시대 춤 비평은 되기의 윤리학을 요청하는 것이다. 내재면 혹은 초월론적 장에서 ‘체’와 ‘체’가 소통하는 그곳이 오늘날 춤 비평이 서야 할 자리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