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 놓으니 더욱 찬란한 '신라 금관', 볼수록 궁금해지는 금관의 비밀
당초 12월 14일(일)에서 2026년 2월 22일(일)까지로 연장 결정 11월 17일부터 온라인 예약 병행
신라금관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지 104년만에 여섯점의 금관과 금허리띠를 한자리에 모은 특별전《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Silla Gold Crowns: Power and Prestige》에 대한 관람 열기가 뜨겁다. 매일 긴 대기줄이 아침부터 이어지며 하루 2550장 한정으로 배포되는 입장권은 오전 중 모두 소진되어 오후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헛걸음을 하기 일쑤였다. 12일 오후 현장을 찾았을 때에도 뒤늦게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금관전의 오늘 입장권은 12시에 모두 소진됐다"는 안내멘트가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윤상덕)은 금관 전시에 대한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뜨거운 호응에 보답하고자 특별전의 전시 종료일을 당초 12월 14일(일)에서 2026년 2월 22일(일)까지 72일을 추가 연장한다고 13일 밝혔다.
2025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일반 관람이 시작된 11월 2일(일)부터 11월 11일(화)까지 모두 26,608명이 전시를 관람했다. 박물관은 전시 개막 이후 관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전시기간 연장과 함께 관람 환경 개선과 경주 여행을 계획하는 원거리 여행자와 장애인 및 노약자의 관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11월 17일(월)부터 온라인 예약 시스템을 병행 운영한다고 밝혔다. 기존의 현장 배포 방식에 더해, 회차당 인터넷 예약 70매, 현장 배포 80매로 운영 방식을 개선하여 현장 혼잡을 줄이고 관람 접근성을 확대할 예정이다.
누리집 예약은 11월 17일 10시부터 국립경주박물관 누리집을 통해 가능하며, 다음 한 주간 원하는 회차를 선택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 10시에 다음 한 주간의 예약창이 열린다. 현장 배포 입장권은 기존과 같이 매일 오전 9시 20분부터 박물관 정문에서 선착순으로 배부된다. 윤상덕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이번 특별전시 연장 결정은 폭발적인 관심에 대한 감사의 의미이자, 더 많은 국민이 쾌적한 환경에서 신라의 황금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며 “지역 주민뿐 아니라 전국의 관람객이 좀 더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볼수록 신기하고 찬란하여라
2025 APEC 정상회의를 기념해 국립경주박물관이 기획한 특별전 《신라금관, 권력과 위신》이 열리는 박물관 1층 신라역사관 3a실에 들어서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익히 보아왔고,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서도 익히 봤던 금관인데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말할 수 없이 경이로웠다.
신라금관은 신라의 왕권을 상징하는 정점이자 동아시아 고대 장신구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조형미를 지닌 걸작이다. 개별적으로 봤을 때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던지, 그만큼 관심을 두고 보지 않아서인지, 전시를 잘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에 소름이 돋았다. 1500년전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던 '황금의 나라 신라'의 위용을 직접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이번 전시는 볼 거리도 볼 거리지만 오랜 학술연구와 발굴 조사의 결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무척 흥미로웠다.
신라가 세운 독자적 세계관과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결정체인 신라금관은 1921년 경주 노서동에서 우연히 공사로 드러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무덤은 훗날 금관총이라 불린다. 이어 1924년 금관총 동쪽의 작은 능묘 발굴조사에서 금관이 발굴됐다. 작은 금방울이 출토되어 금령총이라 불린다. 당시 일본 고고학자들은 신라의 고유한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고 머리띠 형태의 관이 피장자의 머리에 씌워진 것도 확인했다. 1926년 금관총 서쪽의 능묘에서 새가 달린 금관이 출토됐다. 당시 왕세자 신분으로 동아시아에 신혼여행을 온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신라능묘의 부장품을 직접 노출시키는 이벤트가 있었고 이를 기념해 능묘의 이름은 스웨덴의 한자표기 서전(瑞典)과 봉황의 봉을 합쳐 '서봉총'이라 했다. 1969년 경주 교동에서 도굴꾼이 무덤을 파헤쳐 금관을 도굴한 뒤 팔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되면서 1972년 교동금관이 추가됐다. 1973년 발굴된 천마총에선 천마도와 함께 가장 화려한 금관이 출토됐고, 1973~1975년 황남대총 발굴 결과 왕의 금동관과 왕비의 금관이 발굴됐다.
금관의 상징성과 조형
신라의 통치자는 왕호를 가장 높은 통치자라는 뜻의 '마립간'으로 바꾸고 권력을 높이고 신성하게 보이기 위해 황금에 주목했다. 황금은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금관은 단순한 황금 장신구가 아니라 왕족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상징물이었다.
금관은 크게 머리띠와 세움장식, 드리개로 구성된다. 머리띠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졌다. 교동금관을 제외하고 나머지 금관의 머리띠 양끝에 두개의 구멍을 뚫어 금관을 고정하는 끈을 연결했을 것이다. 세움장식은 두 종류로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 모양인데 머리띠 중앙에 곁가지가 있는 나뭇가지 모양이 3개, 머리띠 양끝에 사슴뿔 모양이 두개 세워져 있다.
나뭇가지의 곁가지는 1단인 것(교동금관), 3단인 것(황남대총 북분 금관, 금관총 금관, 서봉총 금관)과 4단인 것(금령총 금관과 천마총 금관) 으로 구분된다. 드리개는 교동금관을 제외하고 5점 금관 모두에 있다. 세움장식의 중앙과 곁가지에는 볼록 장식을 새기고 여기에 곱은 옥과 달개를 달았다. 교동금관은 머리띠에 가지가 밖으로 벌어진 세움장식 3개를 세운 형태로 나무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다른 다섯점의 금관과 달리 곱은 옥도, 사슴뿔 모양 세움장식도, 관에 달린 드리개도 없다.
왕관의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장식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금관을 쓴 왕이 하늘과 소통하고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다. 사슴뿔 모양의 세움장식도 하늘로부터 정령을 받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신라인들은 새를 나뭇가지나 사슴뿔처럼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로 보았다. 모관의 장식이 새 날개 모양을 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곱은옥과 다양한 달개는 생명력과 영원성을 상징했다.
금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금관은 내물왕부터 지증왕까지 신라의 여섯왕이 재위했던 마립간 시기 (356~514년)에 제작됐다. 어른들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금관의 크기, 하리띠의 길이를 재 보는 것으로 간략히 알 수 있다. 머리띠의 길이를 비교해 보면 천마총 출토 금관은 63㎝, 황남대총 북분금관 55.1㎝, 금관총 금관 57㎝, 서봉총 금관 58.1㎝이다. 반면 금령총 금관은 53.7㎝이고 허리띠도 74㎝로 작다. 교동금관은 44.9㎝로 매우 작다.
또한 연구자들은 경주의 최상류층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 주인의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금귀걸이의 고리 부위 두께를 보는데 남성은 고리가 가늘고 큰 칼을 옆에 차고 고깔 모양의 모관, 마구류 등이 함께 묻혀 있다. 반면 굵은 고리의 귀걸이가 출토되면 피장자를 여성으로 본다. 이에 따르면 가는 고리의 귀걸이를 한 무덤은 금령총, 천마총, 금관총이고, 서봉총과 황남대총 북분의 경우는 굵은 고리 귀걸이를 하고 칼을 차지 않았다.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부인대'라고 새겨진 허리띠가 출토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금관은 성인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여성도, 어린이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금 허리띠, 권력의 또 다른 상징
신라의 큰 무덤에서는 금관과 함께 화려한 금허리띠도 나왔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특별함은 금관과 함께 출토된 금 허리띠를 같이 보여준다는 데 있다. 실제로 당시의 최고 권력자가 금관을 쓰고 금 허리띠를 착용한 모습이 어땠을지를 상상해 보게 되는데 그 위엄 앞에서 숨을 죽이게 될 것 같았다.
금허리띠는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 남쪽과 북쪽 무덤 총 여섯 개의 무덤에서 확인되었으며 대부분 금관과 함께 발견됐다. 왕릉이 확실한 황남대총 남쪽 무덤은 비록 금관이 없었고 금동관이 발견됐지만, 금허리띠가 무덤의 주인이 왕의 신분임을 증명한다.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북쪽 무덤의 금허리띠와 천마총의 금허리띠는 특히 장식적 완성도가 뛰어나다. 금허리띠는 금관과 함께 최고 신분을 나타내는 또 다른 장신구 중 하나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착용자의 사회적 위상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는 중요한 장치였다.
금 허리띠는 띠를 매는 띠고리, 장식이 있는 꾸미개, 띠끝꾸미개, 드리개로 이루어진다. 드리개 끝에는 약통, 숫돌, 곱은옥, 물고기 장식, 용무늬 장식 등 다양한 장식이 달려 있다.일상적 물품을 축소해 형상화한 이 장식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착용자가 모든 도구와 권능을 소유한다'는 상징성을 드러낸다. 특히 집게, 칼, 약통 등은 각각 생명 유지와 치유, 권력행사와 관련된 의미를 지닌다. 도구 모양의 장식은 왕과 그 일족이 제사의 주관자이자 사회적 기능의 중심이었음을 나타낸다.
금 허리띠는 무덤 속에서 왕과 귀족의 시신에 착장된 채 발견되는데 이는 금허리띠가 단순한 생전의 장식품을 넘어 사후 세계에서도 권력과 위신을 이어가려는 의례적 장치였음을 의미한다. 금허리띠는 장송의례 속에서 권위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매개체 였다.
100% 순금이 아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관은 사실 100% 순금이 아니다. 금에 은을 섞어 만든 합금으로 제작됐다. 순금이 지나치에 무르고 쉽게 휘어지기 때문에 은을 섞어 강도를 보강한 것이다. 시대에 따라 금의 순도는 차이를 보인다. 초기의 금관은 순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은의 함량이 늘어나 순도가 낮아진다. 가장 오래된 교동금관은 금 89.2%, 은 10.9%로 순도 21.4K인 반면 서봉총 금관은 금 80.3%, 은 18.8%로 순도 19.3K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후대로 갈수록 금관의 크기가 커지고 무게가 늘어나면서 이를 지탱하기 위해 더 높은 수직 강도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본다.
금은 어디에서 났을까? 그 많은 양의 금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경주 근처에서 직접 채굴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들여왔을 것이다. 경주 인근에서 금광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봉화, 상주, 성주 등 경북 내륙지역에서 금이 산출됐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경주 하천에서 채취한 사금을 이용해 제작됐다는 견해도 제기되었지만 사금 만으로 그 많은 금관과 장신구를 만들수는 없다고 본다. 아직까지 금의 산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곱은 옥은 어디에서 왔을까? 곱은 옥은 비취 혹은 경옥이라 불리는 재료로 만들어졌는데 한반도에서는 비취 산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외부에서 수입해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가장 가까운 산지는 일본 열도로 특히 니가타현 이토이가와 유역이 고대부터 비취산지로 유명했다. 성분면에서 일본 열도의 비취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나 신라는 원석을 들여와 자체적으로 가공해 사용했거나 완성된 곱은 옥을 수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곱은 옥은 문헌에는 없는 신라와 일본열도 사이의 교역을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경주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대형 무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안에는 어떤 비밀이 잠들어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