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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he Money in the World, 2018

영화의 원제인 올 더 머니 인 더 월드(All the Money in the World)를 번역하면 “세상의 모든 돈” 정도가 될까. 하지만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돈을 가진' 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 가족이 겪는 불행한 비극같은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 <올 더 머니>는 세상의 모든 돈을 가졌던 폴 게티(Paul Getty Sr. 1892~1976)가 손자가 유괴되자 몸값 지불을 거부하면서 납치범과 흥정 끝에 깍고 깍아 손자를 석방시켰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거부 폴 게티와 그의 손주 납치사건을 다룬 영화 '올더머니'  중 한 장면. 오직 돈을 최고 가치로 여겼으며 예술을 숭배했던 폴 게티 역을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맡았다.
거부 폴 게티와 그의 손주 납치사건을 다룬 영화 '올더머니' 중 한 장면. 오직 돈을 최고 가치로 여겼으며 예술을 숭배했던 폴 게티 역을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맡았다.

크리스토퍼 플러머(Christopher Plummer, 1929~ )가  거부 게티를 연기했고 유괴된 손주 존 폴 게티 3세(John Paul Getty III, 1956~2011)는 찰리 플러머(Charlie Plummer,1999~ )가, 그리고 아들을 구하려고 노심초사 동분서주하는 게티의 며느리이자 게티 3세의 어머니 게일 역을 미셸 윌리엄스(Michelle Ingrid Williams, 1980~ )가 맡았다. 그녀는 마크 윌버그(Mark Wahlberg, 1971~ )이 연기한 전직 CIA 요원 플레처와 함께 아들을 찾기위해 협상에 나선다. 감독은 <글래디에이터>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는 세계적인 거장 리들리 스콧(Sir Ridley Scott, 1937~ )이 맡았다.

세계적인 석유업자로 1957년 포춘지가 미국에서 가장 부자로, 1966년에는 기네스북에 세계최고부자로 등재된 폴 게티의 당시 추정자산 가치는 12억 달러(2021년 기준 약 78억 달러, 한화 10조 3400억원)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할 1976년 당시 그의 자산은 60억 달러(2021년 기준 약 230억 달러, 30조 5천억원)이 넘었다. 돈을 사랑하고 부자가 된 게티의 손자가 1973년 로마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일파인 드랑게타(Ndrangheta)에게 유괴당한다. 드랑게타는 손자의 몸값으로 1700만 달러(2022년 환산 1483억원)을 요구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돈을 가졌음에도 누구 못지 않은 냉혹한 자린고비 게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이어 유괴범들과 협상을 이끌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유괴사건을 기록했다.

처음에는 게티와 그의 가족 모두는 반항적인 십대 손자가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할아버지의 돈을 빼내려는 계략이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내 진짜 납치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게티의 아들 폴 게티 주니어(John Paul Getty Jr.)는 아버지에게 아들의 몸 값을 부탁했지만, 마피아에게 돈을 주면 13명의 손주들 모두 납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납치범들은 인질의 귀와 머리카락을 잘라 우편으로 보내면서 320만불로 깎아 주었다. 그럼에도 게티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인질 석방금이 300만 달러로 줄어들자 게티는 세금 공제가 가능한 최대 금액인 220만 달러(2022년 1,450만 달러, 현 191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하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모자라는 80만 달러는 아들에게 4%의 이자를 받고 빌려 주었다.

거부 폴 게티와 그의 손주 납치사건을 다룬 영화 '올더머니'  중 한 장면.
거부 폴 게티와 그의 손주 납치사건을 다룬 영화 '올더머니' 중 한 장면.

게티의 손자는 몸값을 지불한 1973년 12월 15일 포텐차 지방의 로리아 주유소에서 발견되었다. 석방된 손자는 전화를 걸어 할아버지에게 몸값을 지불해 준 것에 감사 인사를 하려 했지만, 납치당해 공연히 돈만 날리게 만든 손자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후일 9명의 범인이  검거되었지만 2명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납치되었던 손자는 트라우마 때문에 마약에 취해 살았고 1981년 약물과 술로 인한 뇌졸중 이후 실어증과 실명위기 등으로 인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게티는 처음 몸값을 거부한 이유를 다른 손주들도 납치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범죄자와 테러리스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범죄를 용인하는 것으로 폭탄테러, 스카이재킹, 인질학살 등 무법, 폭력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세상 모든 사람은 그의 “돈에 대한 무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돈의 노예인 세계최고의 부자와 아들을 구하려고 거대한 돈의 제국과 전쟁을 하는 어머니, 사람의 생명보다 인질석방을 위한 돈의 액수에만 관심을 가진 대중의 모습은 배금주의, 물질 만능주의를 신봉하는 천박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게티는 고교시절 독서를 좋아하고 어학에 뛰어나 프랑스어, 독어, 이탈리아어는 물론 스페인어, 그리스어, 아랍어, 러시아어를 구사했다. 고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까지 능숙했다. 이런 그의 어학실력은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고 세계최고의 석유회사를 일구는 밑바탕이 된다.  모두가 고난을 겪던 대공황기에도 기민한 투자와 그의 철저한 돈에 대한 사랑은 그를 부자 중의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돈에 관한 한 구두쇠, 수전노, 자린고비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했던 게티지만 그는 1930년대 들어서면서 뉴욕 펜트하우스의 주인으로 처칠의 친척이기도 했던 에이미 게스트 (Amy F. Guest, 1872~1959)의 18세기 프랑스미술과 가구 컬렉션에서 영향을 받아, 대공황으로 인한 불경기 때문에 미술시장에 헐값에 나오는 18세기 프랑스 가구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워낙 인색해서 좋은 작품 수집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가 가진  돈의 힘은 지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걸작들을 소장하게 만들었다. 그가 사망할 당시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경~1576), 틴토레토(Tintoretto, 1519~1594),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1727~1788), 르누아르(Auguste Renoir,1841~1919), 드가(Edgar Degas,1834~1917), 모네(Claude Monet, 1840 ~1926)등 당시 400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600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했다.

물론 게티는 자신의 컬렉션을 기부해 세금 혜택을 받을 목적도 있었지만 진정한 열정으로 컬렉션을 했다. 그는 “수년에 걸친 나의 수집은 사랑의 노동이었다”고 1965년 회고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는 컬렉션을 하면서 <18세기 유럽>(Europe and the 18th Century, 1949), <컬렉터의 선택; 유럽예술의 오디세이 연대기>(Collector’s Choice: The Chronicle of an Artistic Odyssey through Europe,1955) 과 <컬렉팅의 즐거움>(The Joys of Collecting, 1965) 등의 책을 남기기도 했다.

30년대 가구와 미술품을 거쳐 1950년대 들어 게티는 그리스, 로마 조각을 빠졌고 이로 인해 말리부 해변가에 있는 게티 빌라(Getty Villa, 1954)를 짓는 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74년 늘어난 컬렉션을 위해 새로운 건물을 세워 미술관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197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새로운 미술관을 방문해보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중동에 유전을 개발하면서 1951년 미국을 떠난 그는 1959년부터 영국 길퍼드의 서튼 플레이스(Sutton Place)에서 거주했고 특히 1942년 세인트루이스에서 털사까지의 비행에서 악천후로 고생한 뒤 그 후유증으로 비행기를 탈 수 없어 영국에서 LA까지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티의 빌라
로마스타일 정원이 아름다운 게티 빌라

1993년 게티 트러스트(Getty Trust)는 보스턴의 건축가 로돌포 마차도(Rodolfo Machado)와 호르헤 실베티(Jorge Silvetti)에게 게티 빌라의 개조 공사를 맡겨 1997년부터 공사를 시작해2006년 재개관했다. 로마 스타일의 정원으로 둘러싸인 로마풍 건축물에서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고대 유물을 전시한다. 전시는 신과 여신, 디오니소스와 극장, 트로이 전쟁 등 주제 별로 구성했으나 2016~2018년 미술사를 바탕으로 주제를 강조하는 연대순 배열로 바뀌었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미술관인 게티미술관의 게티 트러스트는 1983년 LA의 브렌트우드에 86만2125평 규모의 부지를 구입, 새로운 캠퍼스 건립계획을 발표했다. 부지는 해발 270m로, 맑은 날 LA의 스카이라인은 물론 태평양까지 보이는 풍광 좋은 곳이다. 이듬해인 1984년 ‘백색의 건축가’ 리차드 마이어(Richard Meier,1934~ )를 건축가로 선정해 1989년 착공해 8년만인 1997년  관객을 맞았다. 총공사비는 당시 13억 달러(약 1조 7251억 원)이 들어갔다. 게티 센터는 미술관의 미술관이란 별칭처럼 미술관 외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의 원형이 된 게티연구소(GRI, Getty Research Institute), 중국 돈황벽화는 물론 세계각지의 중요한 작품과 유물도 보존 처리를 맡아해주는 게티 보존연구소(GCI, Getty Conservation Institute), 게티 미술사 정보 프로그램(Getty Art History Information Program), 미술 교육 센터(Getty Center for Education in the Arts), 게티 재단(Getty Trust), 식당(Food Center)과 강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티 보존처리연구소는 자체 내의 미술품 보존은 물론, 하여 다른 나라의 문화 유산 보호와 보존에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 세계적인 연구소이다. 

게티센터 전경과  걸작을 소장한 게티미술관 내부
미술관의 미술관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게티센터 전경
게티센터 전경과  걸작을 소장한 게티미술관 내부
걸작을 소장한 폴게티 미술관 내부

특히 게티빌라와 차별화된 게티센터의 J. 폴 게티 미술관(J. Paul Getty Museum) 컬렉션은 20세기 이전 유럽 회화, 드로잉, 필사본, 조각, 장식미술, 19C및 20C 미국 및 유럽 사진을 포함하는 방대한 컬렉션을 갖춘 종합박물관 성격의 미술관으로 연간 관람객은 약 180만명에 이른다.

1970~80년대 큐레이터 지리 프레일(Jiri Frel,1923~2006)의 부도덕한 출처가 불분명한 유물 구입, 탈세와 가짜유물 다수 구입 등의 잡음도 있었으나, 지금까지 꾸준히 좋은 작품을 수집하는 미술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컬렉션 중 약탈 유물 문제가 대두되어 2006년 미술관은 약탈유물 4점을 그리스에, 2007년 40점을 이탈리아에 반환하기로 약속했다.

돈에 관한 한 악명이 높았던 그래서 자기 손자가 납치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도 목숨 값을 흥정했고, 집안에 동전을 넣는 공중전화를 달았던 게티에게 묻는다. “돈이 얼마나 더 있어야 안심하시겠습니까”라고 그는 대답한다. “더 많이!”

폴 게티
폴 게티

그의 돈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설명할 단어는 없다. 사람도 변하기 때문에 믿지 못했던 그가 유일하게 순수한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모았던 게티 빌라와 미술관의 작품을 보면서, 세상을 모질게 살면서도 개처럼, 늑대처럼 벌어 정승같이 썼다는 생각이 든다. 돈, 돈이란 무엇일까. 과연 많다고 행복할까. 얼마나 많아야 ‘그만’이라 할까.  손자목숨보다 돈을 더 중시했던 게티와 미술품을 사모아 컬렉션을 일구고 이를 후대에 남기고 떠난 게티는 같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게티가 벌인 다른 사람의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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