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 쌓은 치유의 공간.. 조각가 박은선 개인전 《Spazio della Guarigi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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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1. 12 - 2026. 1. 25 , 가나아트센터 전관 (서울시 종로구 평창 30길 28)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조각가 박은선(b.1965)의  개인전 《Spazio della Guarigione(치유의 공간)》이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 3년만에 열리는 개인전이자 2008년 인사아트센터 전시 이후 17년 만에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는 작가의 대표작 'Colonna Infinita(무한 기둥)' 연작부터 COVID-19시기를 계기로 시작된 조명 작품 'Colonna Infinita- Diffusione(무한기둥- 확산), 먹을 사용한 회화 신작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작업세계 전반을 선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한  높이 3m 30cm의 대형 조각 'Generation–Evoluzione(생성–진화)' 가 전시장 1층에 설치되어 관람객을 맞는다. 우아한 균형미와 상승감이 느껴지는 이 조각은 '생성'과 '진화'를 주제로 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박은선 작가의 독창적인 작업방식인 붉은 색과 검은색 화강석을 절단하고 깨트린 뒤 이를 켜켜이 번갈아  붙이고 큐브와 구가 합쳐진 형태로 만든 조형물을 3개 쌓아올린 작품이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 전시장 1층에서 작가 박은선. (사진 함혜리)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 전시장 1층에서 작가 박은선. (사진 함혜리)

전시장에서 만난 박은선 작가는 "화강석은 대리석에 비해 견고하고 남성적인 느낌이어서 즐겨 사용하고 있다 "며  "'생성'과 '진화'는 사각이 생명을 상징하는 구로 진화하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나아트에서 '치유의 공간'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하면서 무언가 새롭고 강력한 것을 보여주고 싶어 천장 높이에 맞춰 3단으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이탈리아에선 더  높은 작품도 선보였다"면서  "사람들은 돌을 높이 쌓아 올리는 내 작품을 보고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고 하는데 그런 위태로움이 바로 나의 삶 자체였기 때문에 그런 형태가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맨손으로 이탈리아에 와서 30여년을 작업하면서 절벽 끝에 서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위태롭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작업장으로 가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저의 모든 작품의 중심에는 단단한 심이 박혀 있어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안전함이 버티고 있어요. 제게는 가족이 바로 '안전함'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전시장 2층에서 만나는 'Cubo'(2025)는 대리석으로 된 일종의 모빌이다. 각각 다른 색깔을 지닌 대리석으로 292개의 구체로 만들고 이를 와이어에 하나씩 연결해 정육면체 모양을 만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조각을 흔들면 구와 구가 부딪히며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시각장애인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가 박은선의 조각 틈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거나 손으로 형태를 더듬으며, 오감으로 작품을 경험했다는 일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작품이다. 이 경험을 계기로 그는 조각이 지닌 감각적 확장성에 주목하며, 조각을 통해 단순히 형태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보고, 듣고, 느끼는 다감각적(Multisensory) 예술을 구현하고자 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된 'Cubo(정육면체)'에 대해 박은석 작가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함혜리)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된 'Cubo(정육면체)'에 대해 박은석 작가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함혜리)

 매끈한 표면의 대리석 구(球)가 알알이 매달려 기둥을 이루고 색색의 빛을 내는 'Colonna Infinita- Diffusione(무한 기둥- 확산)' 연작은   COVID-19(팬데믹) 기간에 나온 작업으로,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역발상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디퓨지오네’는 이탈리아어로 ‘확산’을 의미하는데, 박은선은 이 작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다시 만나는 희망의 확산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8㎜ 두께로 얇게 만든 구형의 대리석을 안에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설치해 대리석의 자연스로운 빛이 더욱 생동감있게 확산되도록 한 작품이다.  빛은 단순한 조명 효과를 넘어, 돌의 내면과 외면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작동한다. 작가는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가장 힘들었던 나라가 제가 사는 이탈리아였다"면서 "3개월동안 집에서 머물면서 무언가 그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고 싶어 조명을 넣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된 ' 'Colonna Infinita- Diffusione(무한 기둥- 확산)' (사진 함혜리)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된 ' 'Colonna Infinita- Diffusione(무한 기둥- 확산)' (사진 함혜리)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된 ' 'Colonna Infinita- Diffusione(무한 기둥- 확산)' (사진 함혜리)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된 ' 'Colonna Infinita- Diffusione(무한 기둥- 확산)' (사진 함혜리)

1층과 2층 전시장 벽에는 그의 회화작품들이 조각작품과 조화를 이루며 걸려 있다.  마(麻)로 짠 캔버스에 먹을 주 재료로 한 작품들이다.  검은 먹으로 칠해진 선들이 그려진 화면에  균열을 표현했다.작가는  "예전에는 조각만으로 전시장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벽이 큰 공백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벽면의  공백을 채우려 회화작업을 시도하게 됐다"며 "돌을 깨트리고 쌓고, 틈을 만들어 내는 조각적인 행위를 캔버스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평면에 표현한 조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일한 형태의 '무한기둥' 작품을 대리석, 브론즈, 알루미늄으로 변주한 조각 작업들을 2층에서 만날 수 있고 야외 전시장에서는 5m 높이의 'Colonna Infinita–Accrescimento(무한 기둥–증식)'(2019), 3m 높이의 'Colonna Infinita–Continua(무한 기둥–연속)'(2025) 등 무게 8톤에 달하는 대형 조각 3점이  선보이고 있다.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은 수직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기둥 형태로, 그의 예술 세계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리석 혹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한 수직적 조형물로 단순히 하나의 돌기둥이 아니라, 두 가지 돌이 반복적으로 중첩되며 생성된 결과물이다. 박은선은 망치나 끌을 사용하여 하나의 덩어리를 깎아내며 형상을 만들어내는 전통적인 조각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을 구사한다. 대리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Carrara) 지역에서 생산되는 두 가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하거나, 두가지 색의 화강석을 사용한다.  이 재료들을 수평으로 잘라 켜켜이 쌓은 다음, 깨뜨리고 벌려가며 의도적으로 틈을 만들어 낸다. 하나의 돌을 깨고, 다른 색깔의 돌을 깨서 에폭시로 판을 붙여 나가는 과정을 반복한 뒤 마지막에 형태를 다듬는다. 번갈아 쌓아 올린 서로 다른 색의 석판이 만들어 낸 줄무늬가 리듬감을 만들고 일부러 만든 틈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작업은 서양의 건축 미학과 동양의 여백의 미가 만들어내는 긴장과 조화를 통해, 물질과 정신이 교차하는 지점을 사유하게 한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 전경.(사진 함혜리)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 전경.(사진 함혜리)

조각작품 22점과 회화 작업 19점까지 총 41점의 작품이 전시되는 이번 전시제목 《Spazio della Guarigione》은 '치유의 공간'을 뜻한다. 그의 조각이 단단한 돌에 난 균열, 그리고 틈에 스며든 빛과 소리를 통해 인간 내면의 회복과 성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 그의 조각은  상처와 균열을 끌어안음으로써, 존재의 회복과 치유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작가는 "내 작품 속의 균열은 단절이 아니라  빛이 스며드는 통로이자 새로운 생명의 시작점"이라며 "명과 암, 빛과 그림자, 비움과 채움이 교차하며, 희망과 절망, 충돌과 화해 같은 상반된 감정이 하나의 조형 언어 안에서 공존하는 작품 속을 거닐며  확장된 시각적 경험과 함께 예술적 '치유'의 감정을 느껴보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965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생한 박은선은 경희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후 1993년 이탈리아 카라라로 건너가 카라라 국립 미술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 di Carrara)를 졸업했다. 조각의 성지(聖地)라 불리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 자리를 잡고 32년 동안 작업해왔다. 이탈리아 3대 갤러리인 콘티니 갤러리(Contini Art Gallery)의 전속 작가이며, 피에트라산타 두오모광장(2024), 로마 콜로세움 고고학공원(2024),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2016)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맹활약 중인 조각가 박은선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된 '생성·진화' 작품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함혜리)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맹활약 중인 조각가 박은선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개인전 '치유의 공간'에 전시된 '생성·진화' 작품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함혜리)

그의  작업은 이탈리아 황제 포럼 박물관(Museum of the Imperial Fora), 이탈리아 헨로 재단(Henraux Foundation), 스위스 취리히 국립대학(University of Zurich),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탈리아 여러 공공장소 및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며 이탈리아 예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박은선은 조각 예술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피에트라산타 시(市)가 매년 최고의 작가에게 주는 프라텔리 로셀리(Fratelli Rosselli)를 수상했으며, 한국인 최초이자 외국인으로는 역대 세번째로 피에트라산타 명예 시민으로 위촉 받았다.

지난 5월에는 작업하고 살아가는 피에트라산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아틀리에 겸 미술관인 ‘Atelier Park Eun Sun’을 개관했다. 유리공장을 리노베이션해 만든 미술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 b. 1943 )가 설계했다. 내년 10월 말에는 전라남도 신안군 자은도에 마리오 보타가 설계하고, 박은선의 작업 세계를 상징하는 ‘무한 기둥’을 중심으로 하는  ‘인피니또 미술관(Infinito Museum)’이 개관할 예정이다.  지난 5월  제19회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기간 중 콘티니갤러리 베네치아에서 열린  《Museo Infinito – Park | Botta》 전시에서는 인피니또 미술관의 건축 모형과 박은선의 조각 및 회화 작품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조각과 건축이 서로 호응하는 공간적 대화를 구현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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