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경 중국 시안(西安)과 셴양(咸陽)을 잇는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땅을 파던 건설 노동자들이 지하에서 우연히 이상한 형태의 흙 인형(도용)과 무덤 유적의 흔적을 발견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고고학팀이 현장 조사를 시작했고, 이 유적이 단순히 일반적인 무덤이 아니라 서한(西漢)의 제4대 황제인 경제(景帝, 재위 BC 157~141년)와 그의 황후의 합장릉인 한양릉(漢陽陵)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고학자들은 황제의 주 능묘를 둘러싸고 방사형으로 배열된 수많은 부장갱(隨葬坑)들 중 일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 초기부터 진시황릉의 병마용에 버금가는, 그러나 크기가 훨씬 작은 대량의 도용들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도용들은 실체 크기의 3분의 1, 혹은 4분의 1정도로 작지만 그 수가 엄청났고 특히 무사 환관 궁녀 가축 생활용품 등 다양성 측면에서 당시 한나라 황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특히 사람의 형상을 한 도용들이 팔이 없는 나체 상태로 출토되어 큰 화제가 됐다. 처음에는 미완성품으로 오해받기도 했으나 나무 팔과 비단옷을 입혔으나 긴 세월에 부식되어 없어진 것으로 확인되면서 고대 장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중국 최초의 지하 박물관
중국 시안(西安) 시내 북쪽, 시안 셴양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한양릉 유적은 지상에서는 이렇다할 것을 볼 수 없는 드넓은 평지의 형태를 하고 있다. 발굴 현장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보여주기 위해 중국 최초로 지하 박물관으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유적은 그 중요성이 너무 커서, 중국 정부는 이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공사를 중단하고 발굴된 부장갱 현장 위에 중국 최초의 지하 박물관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발굴된 부장갱을 현장 그대로 보존하고 그대로 공개하는 지하 박물관은 2006년 완공됐다. 유물 보호를 위해 전시장 내부의 온습도가 엄격하게 관리되며, 조명도 최소화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덧신을 신고 발굴 현장 위에 설치된 유리 바닥 위를 걸으며, 바로 아래에 있는 도용과 유물들이 출토 당시의 모습 그대로 배열되어 있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한양릉 전체 영역은 20㎢에 이를 정도로 매우 광대하며, 경제의 능과 왕 황후의 능을 중심으로 총 81개의 부장갱(隨葬坑)이 방사형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까지 약 10여 개의 부장갱만이 발굴 조사된 상태다. 매장 구덩이에서는 다양한 도자기 인형, 도자기 동물, 일상 용품, 곡식, 무기, 전차 , 말, 류트 등 악기 등 수만 점이 넘는 유물 조각을 분류했다. 인장이 새겨진 도자기 인형 등을 통해 구덩이의 배치는 당시 중앙 정부의 여러 부서와 황궁 내부 기관을 상징했으며 서한 왕조의 정통 궁전 문화를 재현한 것으로 본다.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경제(景帝)의 주묘실(主墓室, 핵심 지하 궁전)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다. 이는 유물 보존 기술의 발전과 미래의 학술 연구를 위해 현재까지 발굴이 유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태평성대, 문경지치(文景之治)
한양릉의 부장품은 진시황의 병마용갱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무덤의 크기도 다르고 부장품의 구성이나 특징도 매우 다른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나라 문화의 기틀을 다진 ‘문경지치(文景之治)’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 BC247?~BC195)은 항우를 대파하고 기원전 202년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했다. 혼란이 이어지다 한나라 정국이 비로소 안정국면에 접어든 것은 여씨 세력을 물리친 유씨 세력의 문제 유항(劉恒,BC 202~157)이 황제로 등극하면서다. 문제는 BC180년부터 BC157년까지 23년동안 재위한 뒤 황위를 아들 유계(劉啓, BC 188~141)에게 물려 주었다. 그가 곧 한양릉의 주인인 경제(景帝)로 16년간 재위했다. 그 다음 황제가 유명한 무제(武帝, 劉徹 재위 BC 141~BC 87)이다.
문제와 경제 두 황제가 다스리던 39년동안 한나라 정국은 비로소 정상궤도에 올랐고 전통적인 시호법에 따라 “도덕적 경지가 높고 견문이 넓은 것을 문(文)”, “정의감이 넘치는 것을 경(景)”이라고 하여 시호가 지어졌다. 이들이 다스리던 시기를 중국역사에서는 ‘문경지치(文景之治)’라 평가하며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한나라 문제와 경제가 다스리던 시기에는 형벌을 가볍게 하고 수차례 명을 내려 이재민과 흉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했으며 부역의 의무를 덜어주었다. 널리 현명한 인재를 구하는 한편 황제 자신이 검소하고 무위(無爲, 자연 그대로 두어 인위를 가하지 않음)로 나라를 다스렸다. 문제가 총애했던 신부인은 치마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짧게 만들었고 방안의 휘장에도 수를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진시황이 자신의 분묘를 거대하게 지었던 것과 달리 문제는 삶과 죽음에 대해 소박한 생각을 지녀서 자신의 무덤 속 모든 기물에 금,은,동, 주석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고 별도로 봉분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경제는 건물에 조각을 새겨넣는 것을 엄격히 금하도록 했으며 관료들도 농업과 양잠업을 중시하도록 하며 재물에 연연하지 않도록 했다. 근검절약하는 풍조를 강조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개선하고 농민들의 부역 부담을 감소시키고 사치낭비를 근절했다.
‘사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두 황제가 중국을 다스린 시기에 경제가 부흥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됐으며 국고는 곡식과 재물로 넘쳐났다. ‘동전을 묶어놓은 실이 썩어 끊어질 정도’였으며 ‘곡식은 오랜기간 쌓여있어 변질될 정도’로 재정이 풍부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평화로운 시대의 문이 열리게 됐다.
한경제와 황후의 합장릉인 한양릉의 부장갱에서는 당시의 사회상과 ‘문경지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수많은 부장품들이 출토됐다.
소박하고 온화한 표정의 도용들
한양릉에서는 1/3 크기의 나체(裸體) 도용(5만여 점 이상 추정), 가축 도용(말, 소, 양, 돼지, 개, 닭 등)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사람 형상의 도용들은 원래 나무 팔과 옷을 입고 있었으나 모두 부식된 탓에 팔이 잘린 모양의 나체로 수천년이 흐른 뒤 모습을 드러냈다. 성별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대부분이 태평한 표정으로 무덤 주인의 일상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식량(곡식, 가장 오래된 차의 흔적), 취사도구, 청동 거울, 칠기 등 다양한 일상생활 관련 유물이 나왔다.
설명판을 참고로 보면 전시된 10개의 갱도 중 가장 긴 피트(Pit) 13의 경우 길이 94m, 폭 3m, 깊이 2.4~2.8m의 구덩이로 황실의 식량 저장고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갱도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쪽에서는 새끼 돼지, 돼지, 양, 염소 등 가축과 개 모양의 도자기 동물이 발견됐다. 새끼 돼지들은 북쪽을 향하고 있고 다른 동물들은 서쪽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 구덩이에서 발굴된 동물 도자기의 숫자는 1391마리. 염소 236마리, 양 189마리, 개 458마리, 돼지 455마리, 새끼돼지 54마리가 두겹으로 배열되어 마치 가축의 세계 같다. 서쪽에서는 대부분 실물 크기의 나무 전차와 맣은 수의 도자기가 발굴됐다. 솥, 냄비, 누에고치 모양의 냄비가 포함되어 있었고 옥수수와 수수 등 작물이 동물 유골과 함께 발굴됐다고 한다.
피트 18은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썩은 나무 전차 두 대가 구덩이의 서쪽 끝에 배치되었고, 백 개가 넘는 전차와 하네스가 남아 있었다. 북서쪽 갱도 구멍에서 7개의 도자기 인형과 2개의 도자기 개가 발견됐다. 동쪽에는 대부분 옷을 입은 도자기 인형이 있었는데, 모두 92개였고, 그 중 21개는 남성, 23개는 내시, 22개는 그려진 여성, 26개의 도자기 조각이었다. 청동 인장을 들고 있는 인물 4도 발견됐는데 청동 인장은 용시앙(永巷)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황궁에서 궁녀와 황실 첩을 구금하는 데 사용되는 장소였다고 한다.
현재까지 발굴된 한양릉의 부장 도용들은 진시황릉의 도용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진시황릉의 도용이 실체크기(180㎝ 내외)로 무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반면 한양릉에서 발견된 부장품은 대부분 실체 크기보다 작게 제작됐는데 실물 크기로 제작할 경우 백성의 고충이 너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양릉에는 무희들과 악사 등 예인이 다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문제와 한경제가 다스린 평화로웠던 시대에 무용은 궁정 의전에 포함되었고 음악도 자연히 발달했다. 백성들은 전쟁과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이는 한양릉 부장품의 온화한 표정과 일상 생활을 중시하는 특징으로 나타나 있다. 무사들의 표정도 덤덤할 정도로 평화롭다. 진시황릉 병마용의 표정들이 무척 굳센 의지를 담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수를 셀 수 없이 넘쳐나는 가축들, 특히 돼지들은 당시의 풍요를 상징한다.
한나라 무제(武帝, 劉徹 재위 BC 141~BC 87)가 부국강병의 시대를 여는데 탄탄한 기틀이 된 ‘문경지치’의 정치 풍조는 후세에도 큰 귀감이 되고 있다. 20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성군이 다스리던 태평성대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한양릉은 살아있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최고 통치자가 어떤 정치를 펴야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지를 후세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