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의 우키요에(浮世絵) 거장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9)의 육필화 '설중미인도(雪中美人図)'가 11월 8일 도쿄에서 열린 동서뉴아트(東西ニューアート) 경매에서 6억 2100만 엔 (약 59억 원, 수수료 포함)에 낙찰됐다. 낙찰자는 일본 가구업체 닛토리홀딩스(Nitori Holdings)로 이번 낙찰액은 호쿠사이 작품 경매가로는 사상 최고액이다.
크기는 98.3cm×34.3cm로 1813년~1819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 국가의 ‘중요미술품’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어서 출품 전부터 높은 관심을 끌었다.
이 소식이 단순히 ‘거액’의 낙찰가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니다. 한겨울의 눈 속에 서 있는 한 여인의 숨죽인 정막의 모습, 그 작은 종이 위의 이미지에는 2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눈발은 잔잔하고 바람 한 점 없다. 우산을 든 여인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서 있고, 그 모습에서 우리는 눈이 내리는 소리조차 들리는 듯한 정적을 느낀다. 호쿠사이가 그려낸 것은 단지 ‘미인’이 아니라, 시간의 정적 속에 깃든 생의 숨결이다.
“내가 예순 살까지 그린 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칠십이 되면 조금은 그림의 이치를 알 것 같고, 구십이 되면 진정한 경지에 이를 것이다.”
호쿠사이는 1760년 에도(오늘날의 도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장인의 집에서 자라 열다섯 무렵부터 판화와 채색화의 세계에 발을 들였고, 생애 90년 동안30번 넘게 거처를 옮겼고, 93회의 개명(改名)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스타일과 세계관을 전복시키며 3만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호쿠사이의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중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 The Great Wave off Kanagawa)》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호쿠사이는 단지 풍경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생과 무상, 현실과 상상을 경계 없이 오가며 그림으로 사유를 펼친 예술가였다.
'설중미인도'는 말 그대로 눈 내리는 거리에서 우산을 든 여인을 그린 작품이다. 배경은 거의 비워져 있고, 복잡한 장면 묘사는 배제되어 있다. 흰 눈과 그 속의 한 인물만이 존재한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하다. 기모노의 옅은 청색과 눈의 흰빛이 만들어내는 대비는 맑고 투명하며, 붓의 한 획 한 획은 장식적이지 않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침묵의 순간에 있다. 감정은 과장되지 않고 여백 속에 응결되어, 관람자의 상상과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에도 시대의 ‘눈’은 단순한 기상 현상을 넘어 순결, 덧없음, 그리고 생명의 순환을 상징했다. ‘미인’은 그런 덧없음의 한 가운데에 서서 영원을 품은 존재로 여겨졌다. 〈설중미인도〉는 바로 그 역설 “사라짐 속에 남는 영원 “을 정제된 시처럼 화폭 위에 펼쳐 보인다. 붓질은 간결하고 단정하며, 그 단순함 속에 생명감이 깃들어 있어 오랜 수련 끝에 얻어진 ‘무심(無心)의 미학’이 느껴진다. 일본의 ‘와비사비(侘び寂び)’ 미학과 맞닿아 있다.
‘와비(侘び)’는 결핍과 불완전함, 소박함에서 오는 고요한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사비(寂び)’는 세월의 흐름, 쇠퇴와 녹슨 것, 낡음 속에서 드러나는 깊은 맛을 뜻한다. 즉, ‘와비사비’란 “완벽하지 않고, 오래되고, 사라져가는 것 속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으로 고즈넉한 멋, 정갈한 슬픔이라고 하겠다.
닛토리 홀딩스는 낙찰 이후 〈설중미인도〉를 널리 공개하겠다는 의향을 밝혀 향후 일본 내 여러 미술관을 순회하며 다시 관람자 앞에 설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